팡팡 · ISBN: 979-11-416-0996-2
모든 의혹과 고통을 기꺼이 써내는 작가 ‘팡팡’이 진실에 닿기 위해 분투한 문학적 기록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봉쇄된 우한의 참상과 생존기를 담은 『우한일기』 출간 이래 중국 정부에서 금서 작가로 지명당한 팡팡은 평생 진실한 글쓰기를 소명으로 삼은 작가다. 거대한 흐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의 눈을 통해 역사를 보여주고, 이데올로기에 파묻힌 인간의 존엄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왔다. 『깨진 칠현금』으로 2010년 제5회 루쉰문학상, 『연매장』으로 2017년 제3회 루야오문학상을 수상하며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았으며, 모두가 이야기하기 꺼리는 주제를 기꺼이 써내며 성역 없는 글쓰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연매장』은 아들 칭린이 어머니 딩쯔타오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중국 현대사에서 희생된 개인들을 마주하는 이야기다. 비판의식과 문학성을 훌륭하게 결합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루야오문학상을 수상했지만, 1950년대 토지개혁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며 수상 직후 중국 정부에서 금서로 지정했다. 그러나 팡팡은 결코 침묵당하지 않았다. 『연매장』은 독자들의 요청으로 대만에서 중국어로 출간되었으며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잊혀선 안 될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모래폭풍처럼 밀려든 역사의 비극 속에 사람들이 선택한 은폐와 망각이라는 생존법, ‘연매장’
‘연매장’은 죽은 뒤 관 없이 곧장 흙에 묻히는 매장의 형태를 일컫는 말로, 원한을 품어 환생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토지개혁으로 삶이 무너져내린 사람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선택한 침묵과 망각 역시 사회적 연매장이라고 할 수 있다. 쓰촨에서 토지개혁 때 도망친 친구의 어머니를 통해 연매장이라는 단어를 알게 된 팡팡은 이 단어를 중심으로 소설 『연매장』을 썼다.
사람이 죽은 뒤 관이라는 보호막도 없이 곧장 흙에 묻히는 것이 연매장이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이 과거를 단호하게 끊어내고, 이를 봉인하거나 내버린 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기억을 거부하는 것도 시간에 연매장되는 것이다. 일단 연매장되면 영원히, 대대손손 누구도 알 수 없다. (...) 이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단순했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느낀 것, 내 의혹과 고통을 성실하게 적어냈다. 일종의 기록으로써 내 복잡한 사연과 심정을 글에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작가의 말」에서)
기억을 잃은 여인 딩쯔타오는 무엇에 가로막힌 듯 자신의 과거를 하나도 떠올리지 못한다. 강물에 상처투성이로 떠내려온 그녀를 의사 우자밍이 치료해주고, 둘은 이 인연을 바탕으로 결혼해 아들 칭린을 낳는다. 소박하고 가난하지만 성실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자란 칭린은 한 회사의 지사장이 된다. 칭린은 아버지 우자밍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를 모시기로 결심하고 대저택으로 모셔간다. 고생길은 끝났으니 행복만 누리시라며 좋은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딩쯔타오도 여유를 누리려던 그때 그녀 눈앞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이 어른거린다. 그러나 과거를 완전히 떠올리기 직전 딩쯔타오는 정신을 놓아버리고, 칭린은 어머니가 남긴 뜻 모를 단어 ‘연매장’을 붙잡고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마침내 칭린은 어머니 딩쯔타오가 지주 계급의 여인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온 가족이 죽임당했다는 사실, 아버지 역시 전란을 틈타 산으로 도망쳐 지주 계급이었던 과거를 평생 숨기고 가짜 신분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은폐와 어머니의 망각이 그들에게 유일한 생존법이었음을 깨달은 칭린은 평생 이 일을 들추지 않기로 다짐한다.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에서 우리는 망각과 기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연매장』은 여러 인물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된다. 사건 당사자인 딩쯔타오, 후대에서 그 사건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칭린, 개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류진위안의 시각이 번갈아 등장하며 토지개혁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한 사건을 다룬다. 이야기를 따라 읽다보면 사건의 당사자인 딩쯔타오의 입장에서 애통함을 느끼기도 하고, 칭린의 마음에 공감하며 희생자였던 부모의 사연이 세간의 주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판단에도 동의하게 된다. 그러나 팡팡은 이 사건을 단순한 비극으로 결론내리는 것에 의문을 던진다.
“사실 자신을 규정하는 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인생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잖아. 어떤 사람은 좋은 죽음을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구차한 삶을 선택하지. 어떤 사람은 전부 기억하기를, 또 어떤 사람은 잊기를 선택해. 백 퍼센트 옳은 선택이란 없고, 그저 자신에게 맞는 선택만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네가 편안한 방식을 취하면 된다고.” (431p)
칭린의 친구 룽중융의 대사를 통해 팡팡은 역사적 사건을 묻어버리거나 기록해 후대에 전하고 기억하는 것 모두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칭린의 선택을 비겁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목격자로서 자신은 문학적 증언을 남길 것을 선택했으며, 그 글 역시 절대적인 진실이 아닌 그 가까이에 가기 위한 노력일 뿐이라는 점을 작품 말미에 밝힌다.
그래, 나는 망각을 선택했고 너는 기록을 선택했어. 하지만 네가 기록하는 이상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그리고 진실은, 칭린은 냉소를 지었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니?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는데. (444p)
동시에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그 경험은 개별적이다. 한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술이 천차만별인 이유도 경험은 단일화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진실을 바라보며 각기 다른 상흔을 안고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갈 따름이다. 다행히 망각과 은폐가 모두의 최선은 아니기에, 『연매장』처럼 곳곳에 남은 생생한 기록들이 우리가 진실에 다다르는 입구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