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식수 · ISBN: 978-89-324-7549-3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와 엘렌 식수의 조화 화음처럼 쏟아지는 텍스트의 향연
엘렌 식수는 ‘여성적 글쓰기’라는 개념을 창안한 뒤 줄곧 그 길에 따른 글쓰기를 추구해 왔다. 거칠게 요약하면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출발하는 글쓰기로, 논리를 비롯해 우리 인간을 둘러싼 구조와 체계를 무너뜨리거나 그 너머로 날아가 낯설고 강렬한 직관들과 직접 연결되겠다는 결의로 다져져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인간이 서로의 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언어를 그 이해 바깥으로 끌고 나오며, 그러한 과정을 함께하는 독자들 역시 미지의 세계로 끌고 간다.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식수가 오직 리스펙토르만을 다룬 세 편의 글을 모은 책이다. 이 짧은 책 속에서 식수는 스스로 여러 차례 모습을 바꾼다. 그는 리스펙토르를 받들어 찬미하는 자였다가 리스펙토르를 닮은 무엇이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권력에 희생당하는 소수자들과 같은 행성에 살고 있는 현대 지식인임을 계속해 자각하고, 비평 훈련을 받은 학자로서 소설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비의에 감화되어 다시금 종교적 열망에 휩싸이고, 그렇게 여러 차례 변환을 거듭하다가 심지어는 ‘우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 책 속에서 식수는 자발적으로 계속 형태를 바꾸며 말씀을 전하는 매개체 혹은 전달자가 되며, 이는 유대인인 그의 정신적 뿌리 가운데 하나인 성경에서 성령이 맡았던 역할과 닮았다. 어떤 텍스트에 얼마나 깊이 감화되어야 그 자신을 ‘말씀을 전하는 자’의 근본적 형태, 즉 성령과도 같은 형태로 변환할 수 있을까? 『리스펙토르의 시간』은 스스로 자신이 주창하는 글쓰기의 전범으로 변신한 ‘글쓴이’가 세상에 전하는 열렬한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