積讀家(적독가)

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 ISBN: 979-11-6790-328-0

이야기꾼 에세이

“수천 년 전부터 직조되어온 삶의 그물망이 도처에서 사라지고 있다”

서사 예술의 종언을 통해 인간 삶의 근원을 묻는 우리 시대의 고전

“이 책은 인간이 더 이상 서로의 경험을 나누지 못하게 된 시대를 그린 벤야민의 가장 비극적인 글이다” _한나 아렌드

오늘날 철학, 문학, 미학, 정치학 등의 학계뿐 아니라 작가, 감독, 음악인 등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는 사상가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기술, 산업화, 전쟁, 현대의 변화 속에서 이야기를 전할 힘이 사라져가는 과정을 날카롭게 진단한 벤야민의 대표작 「이야기꾼」을 비롯해 「요한 페터 헤벨」 「소설의 위기」 「리스본 지진」 「경험지와 부족함」 등 벤야민의 초기 단상부터 중기, 후기의 비평을 망라하는 열세 편의 글을 담았다. 특히 이번 판본은 벤야민의 원전을 새로운 번역으로 소개하는 동시에, ‘경험­전통­구술’이라는 세 축을 따라 ‘이야기꾼과 서사 예술의 종언’이라는 사유의 축이 어떻게 형성되고 진화했는지 벤야민 사유의 궤적을 복원한다. 그 사유를 보다 심층으로 읽어내기 위해 헤로도토스, 몽테뉴, 헤벨, 블로흐, 발레리, 루카치 등 여러 사상가와 작가들의 글을 함께 수록함으로써 벤야민의 논의가 서사와 경험, 역사와 문학을 둘러싼 장구한 지성사의 흐름 속에서 더 깊게 이해될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은 길이도 종류도 밀도도 제각기 다르지만 ‘이야기 기술의 종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귀결된다. “이야기가 사라지는 자리에 정보가 채워지고, 경험이 단절된 자리에 고립된 개인만 남았다”라는 벤야만의 진단처럼, 그는 이야기 기술의 소멸을 단순한 문화 현상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엮어내는 인간적 능력의 상실로 보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지 이야기에 대한 벤야민의 ‘조사弔詞’인 것만은 아니다. 그는 노동, 기술, 매체가 급속히 변하는 시대에 이야기 기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물으며, 조언과 경험이 다시 움트는 말의 ‘발아력’, 정보의 즉시성과 검증의 강박을 비켜 가는 이야기의 ‘여백’, ‘경험의 알을 낳는 권태’의 미학을 제안한다. 즉 “수천 년 전부터 직조되어온 삶의 그물망이 도처에서 올이 풀리고 있다”는 자각 속에서도 이야기가 다시 발아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데이터와 정보의 과잉 속에서 ‘서사’ ‘스토리텔링’ ‘콘텐츠’ ‘내러티브’ 등으로 치장되는 온갖 수사가 공허한 유행어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비평적 실천이다. 『이야기꾼 에세이』가 지금 우리 시대를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와 경험의 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고전이 아닐 수 없는 대목이다.

“경험의 물성과 무관한 서사, 재료의 물성과 무관한 작품이 ‘이미지’가 되어 마치 화폐처럼 유통되기 시작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엄청난 선견지명이다. ……스토리텔링이니 내러티브니 하는 용어들은 업체 브랜딩의 어휘와 정치 프로파간다의 어휘에서 쟁점을 흐리는 핵심어가 되어왔고, 정보의 범람과 알고리즘의 확산으로 인해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이 우리 현대인의 삶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이 쓰는 글은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리 모니에가 바느질한 수예와도 어딘가 비슷한 것 같다. 에세이스트 벤야민이 레스코프라는 독특한 이야기 장인의 후예로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시대를 거스르는 방식 때문이다.” -「서문」에서

『이야기꾼 에세이』, 10여 년에 걸친 치열한 사유의 결정체이자 다양한 시도의 콜라주

「이야기꾼」은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는 벤야민의 글 가운데 하나로, 그의 “비평가적 역량이 지진계처럼 예민하게 드러난 글”이다.「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와 나란히 그의 저작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이야기꾼」은 벤야민의 베를린 학창 시절에 시작되어 1920년대 후반기에 추진력을 얻은 긴 사유의 결과물로, 그가 1926년부터 1936년까지 발표한 에세이, 신문기사, 서평, 단편 등등의 여러 글에서 시험한 개념, 심상, 논의들이 이 글로 최종 수렴된다. 『이야기꾼 에세이』는 「이야기꾼」과 이러한 글들을 함께 엮어냄으로써 벤야민의 생각들이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자 했다. 「요한 페터 헤벨」(1926)에서는 “역사가는 세계사를 다루는 반면, 연감 편찬자는 세상만사를 다룬다”라며 이미 이야기꾼과 정보제공자의 구별을 예고하고, 뒤이어 라디오 강연집인 「리스본 지진」(1931)에서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재앙을 전하며 한 도시의 재난을 세계사의 파장으로 확장하고, 경험·전통·서사의 연결을 라디오라는 매체 속에서 실험한다. 「손수건」(1932)에서는 실제 이야기꾼의 구술 형식을 구현하며 벤야민의 서사적 실험을 절정으로 끌어올린다. 이어서 「경험지와 부족함」(1933)에서는 기술 문명과 전쟁이 인간의 경험과 전통을 어떻게 붕괴했는지 분석하며, 벤야민 사유의 핵심 주제인 ‘경험의 상실’과 ‘새로운 시작’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형식의 텍스트들이 서로 반향하며, 종국에는 「이야기꾼」(1936)에서 모든 조각이 하나의 콜라주로 결합한다. 이렇듯 이 책은 ‘이야기 기술의 종언’을 이야기하기 위해 벤야민 자신이 거쳐야 했던 이야기의 과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이를 통해 각각의 글이 그의 더 큰 주제들과 어떻게 공명하며, 벤야민의 글쓰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역동을 일별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다.

“이야기란 삶이라는 소재에 조언을 짜 넣은 것, 그것이 바로 서사 진리이자 삶의 지혜다”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이야기꾼의 쇠퇴’에 대한 애도에서 시작한다. “우리에게 이야기꾼이란 이미 먼 존재이자 점점 멀어지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거의 매일 그 사실을 확인한다. 우리의 안전자산 중에 가장 안전했던 자산, 곧 경험을 공유하는 능력이라는 자산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한 것 같다.” 이야기꾼의 부재가 남긴 침묵은 정보의 언어가 대신 채워버렸다. 사건의 끝없는 흐름, 그 무수한 설명들 속에서 정보는 과잉 상태다. “매일 아침 우리는 세계 곳곳의 뉴스 기사를 접한다. 하지만 독특한 사건을 알게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사건들은 전부 다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야기가 설명되지 않을 때 오히려 활짝 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한 가지 일화를 찾아낸다. “이집트의 왕 프사메니투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역시 포로가 된 딸이 여종 차림으로 물을 길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그는 무표정하게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곁에 두었던 하인 하나가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본 그는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를 세게 내리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벤야민에 따르면, 헤로도토스는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 역사적 에피소드를 두고 여전히 많은 해석이 오가는데, 시간이 흐르면 무가치해지는 정보와는 달리 이 이야기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발아력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설명이 없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그것은 “공기가 통하지 않는 피라미드의 밀폐 공간에서 지금까지 수천 년간 발아력을 잃지 않고 있는 밀알”과 같다. 이야기는 ‘신비로움’을 품고 있다. 그것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으며, 동시에 여러 의미를 지닌다. 전해질 때마다 세부가 달라지고, 새롭게 다시 쓰인다. 이처럼 이야기의 모태가 되는 경험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경험이다. 이 경험이야말로 모든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길어 올렸던 이야기의 샘으로, 세대로부터 세대로 전수되는 집단적 경험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야기는 일종의 ‘지혜의 서사’이며, 이야기꾼은 ‘삶의 공동체적 경험의 매개자’이자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태도에 관한 ‘조언자’이다. 벤야민은 경험을 전달하는 방식을 두고 “수공업적 전달 형식” “권태와 은밀하게 연결된 행위” “검증되지 않더라도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권위”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 기술은 ‘장인적 솜씨’에 닿아 있는 것이다. 비록 산업화·전쟁·매체 변화가 공동체와 이야기 기술의 생태를 잠식하고 있지만, 머리와 손이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그 기술은 되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경험과 지혜의 회로가 끊긴 시대, 우리는 어떤 형식과 태도로 다시 이야기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벤야민이 예견한 세계 한가운데 있다. 우리는 이미 책이나 드라마를 보는 대신 유튜브에서 요약본을 찾아보고(그것도 배속으로), 얼굴을 보거나 목소를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대신 문자로만 메시지만을 주고받는 데 익숙하다. 경험을 나누고 공동체의 기억을 전승하는 힘이 이러한 소비적·도구적 맥락에서 사라지고, 공동체의 지혜와 경험을 매개하던 이야기꾼은 가속화된 사회에서 도파민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생명력을 이어간다고 했다. 벤야민에 따르면 그러한 이야기가 움트기 위해서는 ‘권태’, 즉 자본의 시간 밖에서 생겨나는 멈춤의 시간이 필요하다. “권태라는 꿈꾸는 새가 경험이라는 알을 품듯이” 가만한 시간의 샘에서 이야기는 솟아나는 것이다. 삶의 여유도 없고, 지루함을 견디는 힘도 잃은 우리에게는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벤야민은,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치료의 첫 과정이듯이, 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강조한다. “병을 이야기의 강물 위로 흘러가게 할 수만 있다면, 병이 그렇게 충분히 긴 강을 따라 하구까지 흘러갈 수만 있다면, 어떤 병이라도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가? 이야기는 어떻게 우리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이 책이 비단 과거의 향수가 아니라 미래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할 경험의 새로운 언어를 찾는 요청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