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1일 가입 · 180권 적독
“너는 세계에서 만난 것 중 가장 참혹하지만 가장 다정한 현상”
봄날의책에서 한영원 시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다. 표제작인 「코다크롬」의 문장처럼, “채도가 높고 쨍한 색 온 세상의 빛을 가져다 쓴” 모습으로. 한영원의 시편들은 너와 내가 감각할 수 있는 수많은 빛과 그림자의 현상들로 가득하다. ‘코다크롬’은 1935년에 개발되고 2009년에 단종된 아날로그 필름을 일컫는데, 그 색과 톤의 재현력이 실로 놀라웠으므로 사이먼 앤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같은 제목의 찬가를 만들어 기릴 정도였다. 그 필름의 특징은 쨍쨍한 콘트라스트다. 밝고 어두운 부분의 극명한 대비. 이는 한영원의 시편들과 꼭 맞춤한다. ‘나’와, 그리고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너’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 속에서 그 드넓은 자장 안에서, 시인은 “우리 사이에 수백 개의 연결고리”(「하멜른의 아이들」)들을 감각하며 사유한다. “젊거나 늙어 있”는 “양면의 세계”(「코다크롬」) 속 감정과 표현의 낙차 큰 이미지들을 드러낸다. 아울러 그의 시편들은 단종된 아날로그 필름 이미지들 이후, 잔존하는 빛을 담아내는데, 생생한 색감 이후에 남은 빛의 미래를 어쩌면 종말로, 하지만 “종말을 다른 세계로의 입구”(「코다크롬」)라고 의식하면서 한영원은 독특한 미래감을 형상화한다. 더 나은 방향을 포기하지 않고 다정함을 잃지 않으며 사랑하는 마음을 지속적으로 품는다.
패러독스 빛, 이채로운 이름들의 세계 “그러므로 너는 혼자 집필되지 않는다”
「코다크롬」에서 타자는 무수히 이채로운 이름들로 등장한다. 유예, 하나, 애수, 잔느, 이세벨, 마치, 이치로 이치고, 람다, 이치로, 이리……. 그들은 저마다 풍성하고 독특한 이미지와 감정을 품고 있는데, 가령 「유예와 나」에서 ‘유예’는 방향성 없이 부유하는 타자이다. 엘리베이터 안 군중 속에서 마주친 유예는 도착해도 내리지 않고, 그를 보는 ‘나’의 시선은 무심하듯 멀뚱멀뚱하다. 시 「마치」에서 서술되는 ‘마치’는 경기에서 매번 지는 사람이다. “삶은 오늘 이긴 애가 계속 이기는 게임이야”라고 주억거린다. 그를 무기력하고 의기소침한 슬픔 속에 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반면 「람다 세계」 속 ‘람다’의 슬픔은 좀 다르다. “슬픔에 어떤 이유도 없음은 정당”하다는 발화에서 엿볼 수 있듯, 람다의 슬픔은 어떤 그윽하고 근원 없는 슬픔을 표상한다. 또한 시 「진세이 이치로」의 인물 ‘이치로 이치고’는 담담하다. “도끼와 칼을 만드는 혈거인”을 자신의 본질이라고 느끼며, 무뚝뚝하고 건조하게 “비-인생”을 표방한다. 「밤의 하이웨이」에서 이세벨은 고통 속에 울부짖는 동적 에너지 속에서 “밤의 하이웨이를 끊임없이 달리는 상상을” 한다. 이렇듯 「코다크롬」의 시편들 속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들이 혼재하며,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저마다의 생명성으로 꿈틀거린다. 「비데오엠」에 등장하는 ‘이리’는 “전후 세대”이므로 인간으로 서술되지만, 시를 읽어 내려갈수록 그것은 동물인 ‘이리’가 되기도 하고 이윽고 “조립”되는 무생물의 범주로까지 변신하다가, 종국에는 “흘러내려 알 수 없는 외국의 단어” 혹은 “산란하게 흩어”지는 존재가 된다. 그 타자들의 놀라운 양면성과 진폭이 한영원의 시를 함축할 테지만, 아울러, 선우은실의 해설처럼, 마주한 타자들은 어쩌면 ‘나’의 파편일 수도 있다. “한영원의 시에는 수많은 자기의 부분들과 마주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것은 때로 감정(슬픔)이고 때론 상태(죽음)이며 혹은 인식(세계)이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역설의 세계이다. 시편들은 “이기고 싶다는 마음과 지고 싶다는 마음이 구별되지 않”(「굿바이」)는 상태를 동시에 품고, “사람처럼 보이게도 하고 신처럼 보이게도”(「유예와 나」) 한다. 어떤 울퉁불퉁함이 한 세계 혹은 이름들 속에서 좌충우돌하므로 모순과 역설의 힘은 시의 배면에서 창발한다.
미래감, 꿈의 동굴 “암실 밖은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영원이 감돌고 있다”
이 시집의 독특한 정조는 어쩌면 미래감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을 듯하다. 「코다크롬」에는 유독 미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인류 최후의 항해를 하고 있는 중”이라는 인식에서 드러나듯 그 미래는 “별다른 것 없어 슬”(「아게하」)프다. 사랑하는 미래라는 것이 어떻게든 가고 있다는 그 속수무책과 묵시록적인 예감으로도 가득하기에 “가만히 길에 서 있을 것”(「묵시의 세계」)이라는 화자의 다짐 역시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라면 어떤 지속의 기미 역시 술렁인다. “사진가의 사진은 미래가 없이도 지속될 거라”(「코다크롬」)는, 잔존하는 빛의 세계. 착시와 환영, 자욱함과 아득함의 세계. “빛이 한군데가 아닌 여러 군데로 쏟아져 / 바다가 빛으로 휩싸인 미래라고 착각할 뻔했다”(「뱀아이」) 같은 진술처럼, 미래감은 한영원 특유의 시적인 미학을 형상화한다.
그러면서 「코다크롬」은 미래감을 품는 동시에 먼 과거라 할 수 있는 꿈, 환상 동화, 신화, 민담의 영역을 마주한다. 흡사 꿈의 동굴 같은 시편에서 화자는 “피리 불면 선뜻 따라가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고 “더 멀리 뛰고 더 멀리 날”았으며 “밥을 열아홉 끼 먹고 먹은 만큼 사랑해보고 싶”(「하멜른의 아이들」)다고 발화하는데, 한영원의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샤먼’ ‘뱀아이’ ‘왕’ ‘용’ ‘거인’ ‘볼퍼팅어’ 등의 형상은 독특한 중세풍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특히나 샤먼의 이미지가 눈에 띈다. 「코다크롬」에서 샤먼은 영혼을 재현하고, 자신의 조각난 시체를 찾아다니며 떠돌며, 세계의 가장자리를 감각하는 존재로 그려지며, “건너가면 네가 되어버리고 / 머무르면 내가 되어버리는”(「플래시 셔터 플래시」) 듯한 ‘나’의 분신 혹은 조각으로 변주된다. 한영원의 시에는 이질적인 풍경과 매혹적인 세계가 있다. 천천히 덮이는 애수와 눈 속의 적요가 고스란하다. “암실 밖은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영원이 감돌고 있다”.(「암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