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rapia · 2025년 3월 6일 가입 · 493권 적독
윤성훈한뉘
한자는 어떻게 예술이 되고 역사가 되었는가 중국 고대부터 청대 후기까지 그 형태미의 오랜 역사를 읽다
초창기 갑골문과 금문에서 왕희지를 거쳐 해서의 성립으로, 나아가 안진경, 황정견, 축윤명, 등석여의 붓끝에서 꽃을 피운 예술적 형상화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시각 예술을 선도한 서예의 세계
살아 움직이는 형상의 역사, 3천 년의 무늬를 읽다
한자는 형음의形音義 즉 모양, 소리, 뜻이라는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주로 모양의 측면에서 바라본 한자 역사의 이야기다. 한자의 모양에 대한 이야기는 기존의 학문 분류로는 고문자학과 서예론에 속한다. 고문자학은 오래전 한자가 형성되던 시기의 자료를 판독·연구하는 학문으로, 상대商代·주대周代의 갑골문과 금문, 그리고 진한秦漢 이전의 간독簡牘 문자를 다루는데,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이상, 가깝게 따져도 2천 년쯤 전의 일이다. 모든 초창기가 그러하듯 한자도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하며 변동성과 유동성이 컸다. 그만큼 어려운 분야인 고문자학은 엄밀한 고증의 세계이며 다루기에 지나치게 까다롭다. 고문자학의 성과를 원용하여 한자를 해설한 책들이 대체로 초보적이고 간단한 언급에 그치는 까닭이다. 성공적 성과를 보인 책조차도 한자 성립기 이후 모양의 변화까지 다루는 일은 거의 없다. 한편 서예는 생생한 예술의 세계이다. 서예의 경우 고문자학과 달리 과거 역사 속 글씨가 곧바로 창작의 준거가 되곤 한다. 지금 붓을 쥔 창작자의 입장이 중요한 반면, 옛 작품이 서 있던 당대 문화사의 흐름은 종종 잊힌다. 이 책은 고문자학의 학문적 성과를 받아들여 한자 초창기의 역사적 배경을 충실히 밝히는 한편, 한나라, 위진, 당나라를 거치며 자리잡고 이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붓글씨의 역사, 즉 서예라는 미적 성취의 세계 또한 실제 작품의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했다. 이를 통해 문자의 초창기부터 발전기, 그리고 원숙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후기까지, 한자의 역사를 통틀어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고문자학과 서예사라는 두 분야의 거대한 성과를 저자 나름의 눈으로 들여다보고 소화한 후, 이를 다시 개성적으로 서술해 낸 드문 성취이다.
한자의 모양이 걸어온 길, 그 획의 역사 한자의 모양은 계속 변해왔다. 〈조전비曹全碑〉 등 후한 말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비석들에 쓰인 예서隸書, 왕희지가 쓴 활달하고도 전아한 행초서行草書, 당나라 초기의 구양순이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에 쓴 근엄한 해서楷書, 당나라 중기 안진경의 진솔하고 힘이 넘치는 글씨, 북송의 소동파가 유배지에서 남긴 〈황주한식시권黃州寒食詩卷〉의 음울하고 다면적인 글씨, 명나라 축윤명의 자유분방한 초서草書, 서예와 전각篆刻에 침잠해 은거했던 청나라 정경丁敬의 예스러우면서도 파격적인 도장 글씨 등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서예가들이 남긴 글씨들은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지니고 있다. 이 글씨들에는 한편으로는 한 시대의 정신이, 다른 한편으로는 한 예술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이 책에서는 다룬 내용 가운데 특히, 안진경의 글씨를 다룬 ‘진眞’, 손과정과 회소 등의 초서를 다룬 ‘서書’에 해당하는 당나라 중기부터 시작하여 송, 원, 명을 거쳐 청대淸代의 전각과 전서를 다룬 ‘인印’과 ‘전篆’에 이르는 장들은 본격적인 서예사 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깊이 있는 서술을 선보이고 있다. 한자의 역사에서 첫손에 꼽아야 할 집대성은 당나라 초기 해서이다. 해서는 왕희지의 행초서로 대표되는 남조의 붓글씨와,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북조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새김 글씨 전통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모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자의 역사는 초당 해서를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할 수 있다. 해서 이후 한자의 모양은 한 시대의 산물이라기보다 개인적·예술적 창조의 결과물이 되었다. 해서 이후의 훌륭한 글씨들은 모두 위대한 예술 정신의 창조물이다. 갖가지 모양을 지닌 수많은 글자를 갖춘 한자는 보기에 참으로 다채롭다. 그러한 형태미의 진주를 품은 바다를 탐험하려는 모험가들의 서예는 동아시아에서 시각 예술을 선도하는 문화의 정화精華가 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서예라는 찬란한 미적 성취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은 서예가가 서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조망한 후, 실제 서예 작품을 자세히 톺아보며 감상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한자의 모양이라는 거대한 문화사적 흐름을 독자들이 더욱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