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rapia · 2025년 3월 6일 가입 · 277권 적독
클레르 마랭한뉘
‘발 없는 새’는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대사에 등장하지만, 뿌리 뽑힌 청춘의 불안에 대한 은유이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자리의 존재들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자리를 찾아 기꺼이 이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람의 실존이 요구하는 자리는 생존의 욕구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시몬 베유가 “뿌리 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실존의 깊이와 충일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에 닿고자 하는 포기할 수 없는 갈망과 고뇌를 환기시키는 말로 이해해도 되리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뿌리 내림을 위해서 뿌리 뽑힘을 감수하려 한다. 자신의 실존의 여러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일치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자신의 생애와 진심으로 화해하기 위해서.
그런데 우리는 이렇듯 준거점이자 출발점, 근원이 되어 줄 자리를 염원하지만, 그런 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세상은 당신을 위해 어떤 공간도 만들지 않았다”고 날마다 위협하는 세계를 통과하는 우리는 이 세계의 질서가 허용하는 자리를 찾아 분주하고, 퍼즐의 빠진 조각이 자신임을 주장하고, 주어진 자리를 통해 규정되고 식별되기를 바랄 뿐 아닌가? 그 사이 이동하는 법도 잊은 채 고정된 자리에 붙박인 존재가 되고 나아가 대체 가능한 노동 상품이 되었을 뿐 아닌가? 모든 순간을 예측할 수 있을 때, 삶의 게임이 어떻게 플레이될지 정해져 있을 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 게임을 하고 싶을까? 프랑스 철학자 클레르 마랭의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오늘 세계의 현실과 거기에 놓인 우리의 실존이 겪는 첨예한 딜레마를 가로지르는 질문의 책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바라는 자신의 자리(제자리)는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자리는 질문이 된다. 결여된 것은 과잉으로 존재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우리는 늘 흘러넘친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와 잘 맞는 세계라는 환상에 머물 때보다 척박한 자리에서 한계 밖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을 자각할 때 실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다시, 우리는 자리의 존재이면서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인 것이다. 자리 옮김의 사유의 거의 모든 측면을 섬세히 다루면서, 위압적인 훈계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듯 대화를 제안하는 그녀의 철학적·문학적 에세이가 존재의 자리를 찾는 여행에서 길 잃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독자들의 손에 가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