積讀家(적독가)

@Astrapia · 2025년 3월 6일 가입 · 493권 적독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라는 신비가 그려 낸 신학의 궤적)

책 소개

신학의 시금석은 수난이다. 현대를 대표하는 정교회 신학자가 제시하는 신학의 회복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는 현대 영미권을 대표하는 정교회 신학자인 존 베어가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 그리하여 신학함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책이다. 오리게네스와 이레네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교부들의 권위 있는 원전 비평판을 작업한 교부학자이자 신학자로서 그는 『니케아로의 길』과 『니케아 신앙』와 같은 책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성을 다시 검토하는 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는 그러한 작업을 압축해 보여주는 요약판임과 동시에 그러한 작업이 지향하는 바를 드러낸 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존 베어는 신학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두고 오늘날의 신학 전반에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물음을 던진다. 그에 따르면 현대 주류 신학은 대체로 이렇게 움직인다.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이라는 신학공식을 먼저 주어진 것으로 놓고, 성서를 창조에서 타락, 구원사의 전개, 성육신, 수난, 부활, 재림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시간적 서사로 읽는다. 이 구도 안에서 십자가는 일종의 중간 사건이 되고, 성육신은 수난보다 앞서는 독립적 출발점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베어는 멈추어 서서 묻는다. 과연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사유한 방식인가? 그들은 신학적 사유를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해 나갔는가? 더 나아가 이것이 신학적 사유를 하는 올바른 길인가? 그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한다.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걷고, 기적을 목격하고, 변화산에서 그 영광을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난의 순간 모두 그를 떠났다. 심지어 베드로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그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은 수난 이후였다. 부활하신 주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 곁에 다가왔을 때, 그분은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에 관한 성서의 말씀들을 풀어주셨고, 빵을 나눌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다. 그리고 그분은 곧 사라지셨다. 이 장면이 신학의 원형이라고 베어는 말한다. 신학은 수난을 출발점으로 삼아, 뒤를 돌아보며, 그 분으로 성서를 다시 읽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신학은 수난의 빛 안에서만, 그것도 뒤를 돌아보는 방식으로만 올바르게 이루어진다고 그는 강조한다. "성육신"이라는 말도,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것도, 수난 이후의 고백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두 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신비이며, 그리스도의 신비란 바로 이 역설, 죽음 속의 생명, 약함 안에 드러난 권능, 종의 형상으로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말이다. 베어는 이 통찰을 순교자 이그나티우스, 리옹의 이레네우스, 테르툴리아누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사르디스의 멜리톤, 오리게네스, 고백자 막시무스, 오리게네스와 같은 교부들과의 치밀한 대화 가운데 펼쳐낸다. 성서 해석과 교의학, 전례학과 성상학을 가로지르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일관된 신학적 시선으로 수렴됨을 보여준다. 그 시선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분, 그분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이다. 신학이 파편화된 오늘, 성서학과 교부학과 조직신학이 각자의 언어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 시대에, 베어는 그 모든 분열의 뿌리가 출발점의 상실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학함(성서를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렌즈로 읽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변모시키는 능력을 성찰하는 것)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한다. 이는 복고가 아니라 회복이다. 근대 이전의 통찰을 신중하게 재전유함으로써, 오늘의 신학이 잃어버린 통합과 생명력을 되찾으려는 시도다. 『그리고 신학이 시작되었다』는 신학이 어디서 시작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신학이란 무엇인지, 성서를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에 관한 오래된 물음들이 새롭게 살아난다. 신학을 처음 배우는 이에게도, 신학의 길에 지쳐 출발점을 잃어버린 이에게도, 이 책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의 낯선 동행자처럼 불쑥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