積讀家(적독가)

@Astrapia · 2025년 3월 6일 가입 · 140권 적독

벤야민 연구

책 소개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 유대계 지식인,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생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그는 일찍이 아도르노가 특징지었듯이 비범한 사변의 능력과 고도의 문학적 특질이 결합된 문체를 구사하는 글들을 썼고 그 대상은 문학과 예술, 사진과 영화와 건축뿐만 아니라 특히 『파사주』 프로젝트(국역: 『아케이드 프로젝트』, 새물결)의 경우 19세기의 역사와 사회 전체를 아우른다. 글의 형식은 고전적 작품과 작가 또는 사조에 대한 문헌학적 해석(주해)을 시도한 논문을 위시하여 그 자신이 ‘사유이미지’라고 칭한 단상들, 언어나 역사와 같은 철학적 주제에 대한 성찰을 펼친 트락타트와 에세이, 신간에 대한 서평, 작가의 초상을 그린 에세이 등 실로 다양하다. 1920년대 중반 ‘정치적인 것으로의 전환’을 이룬 이래 그는 스스로 ‘문학투쟁의 전략가’라고 칭한 비평가의 임무를 수행하는 글쓰기를 전 방위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한다. 이때 초기부터 견지해온 유대신학적-형이상학적 사유는 새로 전유한 역사적 유물론과 혼융되어 독특한 사상지평을 이루게 된다.

68학생운동 당시 프랑크푸르트학파, 신좌파 등이 부상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주목받기 시작한 벤야민은 1970년대 초 독일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에서 『전집』이 출간되면서 서구에서 이른바 “벤야민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활발한 수용의 역사를 몰고 왔다. 그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 담론에서 뜨겁게 논의되고 인용되는 작가이다.

국내에 1970년대 중·후반부터 단행본으로 저작과 전기가 소개되기 시작한 벤야민은 2007년 도서출판 길에서 15권으로 기획된 『선집』(처음에는 김영옥, 윤미애, 최성만, 나중에 임석원, 김남시 합류)이, 그리고 2009년 한길사에서 『독일 비애극의 원천』(김유동, 최성만 옮김)이 출간되면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수용되어 왔다.

황호덕 성균관대 교수(국문학)가 『상허학보』 35호(상허학회, 2012)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국내 국문학자들이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 학자로 1991년에서 2002년까지는 게오르그 루카치, 2003년에서 2007년까지는 가라타니 고진이 꼽혔다, 그리고 2008년부터 2011년까지는 발터 벤야민이 꼽혔으며 가라타니 고진, 미셸 푸코, 피에르 부르디외, 조르조 아감벤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책은 국내에 벤야민을 번역하고 연구한 대표적인 전공자로 알려진 최성만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가 그간 학술지에 발표한 벤야민 관련 주요 논문 10여 편을 모아놓은 논문 모음집이다. 저자는 2007년 『벤야민 선집』 출간을 도서출판 길과 함께 처음 기획한 이래 서너 명의 전공자들과 함께 벤야민의 주요 저작들을 번역해왔다. 선집은 2024년 5월 현재까지 총 15권 가운데 12권이 나왔다. 또한 저자는 벤야민의 생애와 저작들을 소개한 『발터 벤야민: 기억의 정치학』(길, 2014년)도 출간했는데, 오래전에 절판된 그 책이 향후 중쇄될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한 상태이다. 따라서 이 책이 그 틈을 어느 정도 메워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벤야민 연구』에 실린 논문들을 선별할 때 저자는 『벤야민 선집』에 실린 ‘해제’들과 가급적 중복되지 않도록 신경을 썼고 아울러 각각의 논문을 오늘날의 수준에 맞게 용어를 수정하고 보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밖에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과 ‘한국에서 벤야민 사상의 수용에 대하여’를 실었다. 그리고 최근 저자가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는 동학·천도교와 벤야민을 연결해서 쓴 강연문 「정신이 깨어 있는 ‘침잠’과 동학(東學)에서 ‘수심정기(守心正氣)」, 망명기에 벤야민의 생계를 적극 지원하고 그 자신도 여러 에세이를 발표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중심기관인 「사회연구소」를 소개한 글 「자유로운 연구를 수행하는 한 독일 연구소」(1938), 1916년 무렵 숄렘과 교류하면서 ‘정의’(正義)에 관해 적어둔 메모 「정의 범주에 대한 연구를 위한 노트」와 그에 대한 해설을 ‘보유’로 실었다. 특히 이 ‘정의론’은 벤야민의 사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정의’ 개념의 독특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저자가 벤야민을 처음 접하고 연구하게 된 계기를 간략하게 소개한 글에 따르면 벤야민은 저자에게 단지 학문적으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저자는 2020년 가을에 출범한 ‘유럽인문아카데미’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강의하면서 젊은 독자들과 흥미로운 소통과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 논문모음집이 그 부산물로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