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trapia · 2025년 3월 6일 가입 · 359권 적독
정경영 · 김경화 · 권현석 · 정혜윤 · 계희승 · 이상욱 · 권송택한뉘
“세상은 읽는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크 아탈리
눈을 감고 귀를 열면 들리는 것들 청취를 통해 사회를 감각하는 청각적 사유의 확장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서의 ‘소리’에 주목하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소리연구(sound studies)’ 연구자들과 인천국제공항을 함께 걷는다. 연구자는 학생들에게 공항의 일정 코스를 걸으면서 이 장소에서 들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게 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통해 학생들 모두에게 ‘가장 인상 깊은 소리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여학생들은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라고 답했는데, 놀랍게도 남학생들은 단 한 명도 이 같은 답을 하지 않았다. 많은 여학생들이 공항에서 들은 특징적인 소리로 구두 굽이 부딪히는 소리를 꼽았는데, 그 소리를 남학생들은 단 한 명도 듣지 못한 것이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학생들은 그 소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하지 않아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그 소리에 관심이 가지 않았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젠더의 차이가 듣는 소리의 범위와 방식을 결정한 것이다.
‘소리연구’에서는 모든 소리의 의미가 사회ㆍ문화적 맥락 안에서 ‘구성된다’고 믿는다. 음악이나 언어 같이 특수한 소리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사회ㆍ문화의 맥락 안에서 “발생하고 소통되며 수용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는 ‘소리’는 단순한 청각 자극이 아닌,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새로운 감각으로 정의된다. 이 책 『듣기의 철학』은 ‘소리를 듣는다는 것’에 대한 다양한 관점의 학문적 접근을 바탕으로 소리라는 존재와 청취라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또한 이 책은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에서 오랫동안 천착해 온 소리연구의 결과물로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집단연구로 이루어 낸 인문학적 소리연구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소리’와 ‘듣기’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자들이 모여 젠더, 권력, 예술, 기술, 환경을 아우르는 다학제적 통찰을 제공한다. 책은 소리가 어떻게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 예술적 가능성을 확장해 왔는지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특히 ASMR부터 AI 음성비서, 게임 사운드 디자인까지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청취 경험들을 복합적 의미로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안내하며, 청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인문학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또한 우리가 매일 듣고 있지만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혹은 무심코 지나쳤거나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듣게 되는 소리들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하고 탐구하며 귀를 열면 들리는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성찰한다. 이 책은 그렇게 익숙한 일상의 소리를 낯설게 하고, 그 낯섦 속에서 인간과 사회, 감각과 권력, 기술과 정체성을 다시 듣도록 우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