積讀家(적독가)

@dalcrose · 2023년 12월 9일 가입 · 317권 적독

낭비와 베끼기 (자기만의 현재에 도달하는 글쓰기에 관하여)

책 소개

미국 현대시의 유일무이한 컬트적 존재이자 ‘록스타’ 시인으로서 정치적, 미학적 최전선의 글쓰기를 온몸으로 밀고나간 아일린 마일스의 국내 첫 책이 출간되었다. 그는 반세기 가까운 전방위 글쓰기를 통해 타협하지 않는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시인이었고, 일흔 살이 넘는 지금도 어느 때보다 정열적인 뉴욕의 작가이자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1992년에는 노동계급 퀴어예술가로서 빌 클린턴과 조지 H. W. 부시가 맞붙었던 대선에 뛰어들어 미국 전역에 작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고, 당시 아일린 마일스의 출마에 응답하는 헌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President〉(조이 레너드)는 삼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전 세계 진보적 예술가들과 퀴어 커뮤니티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핵심은 베끼기copy다. 모든 예술은 삶과 관련하여 창조되며, 우리는 그 삶에 감동받고, 글쓰기는 그러한 경험을 ‘베끼는 것’이다. 이는 어떤 존재를 원래의 장소에서 그대로 다른 맥락과 조건으로 옮겨옴으로써 생성되는 낯섦의 미학, 혹은 데페이즈망(전치)의 기법으로도 볼 수 있다. 마일스는 이러한 글쓰기를 항우울제나 유산소 운동처럼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 도구가 아니라, 끝없이 주문을 읊는 하나의 수행으로 지속한다.

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순전한 시간 낭비로서 자기 삶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베끼고 그 허위를 폭로하는 일이야말로 문학적 구원의 길이 된다. 그러므로 아일린 마일스의 글쓰기 스타일은 정치적 조건들과 밀접하면서도, ‘문학은 지극히 심오한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상반된 태도 사이에 존재한다. 그 사이에서 명멸하는 광증과 같은 글쓰기는 가난한 이들을 밀쳐대며 나아가는 대도시 뉴욕의 실체를 은유로서 그려낸다. 그리고 ‘대도시 뉴욕’은 ‘지금 여기의 도시’에서 반복되고 변주된다.

한국어판에는 저자와 자신을 기꺼이 ‘우리’라고 부르며 ‘대안적인 장소의 발명가’들이라고 밝힌 김선오 시인의 서문을 수록했다. 책 뒤편에는 조이 레너드의 헌시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 원문 도판과 번역을 실었다.

한겨레 .txt 2025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