積讀家(적독가)

@dalcrose · 2023년 12월 9일 가입 · 317권 적독

오래된 빛 (존 밴빌 장편소설)

책 소개

존 밴빌이 시간의 틈새에서 포착해낸 아련한 빛 사랑과 상실, 기억의 속임수에 대한 섬세한 탐구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나는 과거의 첫사랑 열다섯 살, 친구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 소년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언어의 마법사’로 불리는 존 밴빌이 사랑과 상실, 기억이라는 주제로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전작 『이클립스』 『수의』에도 등장했던 앨릭스 클리브와 캐스 클리브 부녀(父女)가 다시금 등장하는 『오래된 빛』이다. 『오래된 빛』은 과거와 현재, 크게 두 갈래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 앨릭스의 회상으로 이뤄지는 과거 부분은 앨릭스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친구의 어머니인 서른다섯 살 미시즈 그레이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다. 이웃을 서로 잘 아는 작은 타운에서, 그것도 절친한 친구의 어머니와 불륜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자의식이 형성되고 성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청소년기의 앨릭스는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사랑에 급격히 빠져든다. 그러면서도 미시즈 그레이의 가족들에게, 혹은 타운 사람들에게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걱정과 자기 어머니를 배신한다는 죄책감이 그를 괴롭힌다.

딸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나이든 연극배우로서의 현재 아버지를 잃은 여배우와 함께하는 인생 첫 영화 촬영

한편 반백 년이 지난 현재의 앨릭스는 나이 지긋한 배우로, 딸 캐스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런 그에게 〈과거의 발명〉이라는 제목의 영화에 출연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온다. 평생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던 앨릭스로서는 처음 있는 영화 촬영이다. 그의 상대역을 맡은 유명 여배우 돈 데번포트는 최근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여읜 상태이고, 여러모로 캐스를 연상시킨다. 애도와 회상에 잠긴 앨릭스를 흔들어 깨우듯, 소설의 1부는 돈 데번포트의 자살 시도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끝이 난다. 2부에서 앨릭스는 영화 촬영을 중단시킨 채 돈 데번포트를 데리고 캐스가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 해안을 찾아간다. “다시 데려오지 못해”라는 아내의 예언 같은 한마디와 함께. 등장인물들이 움직이면서 작가 역시 주제를 한층 깊이 탐구해나가며, 그 과정에서 신화와 성경, 다양한 예술작품, 때로는 과학까지 끌어와 사유를 풍성하게 만든다.

교차하고 조응하며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와 현재 한 사람의 인생을 섬세하고 정밀하게 묘사한 밴빌의 문장들

소설은 앨릭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고, 이야기들은 여러 번에 걸쳐 조금씩 다른 빛을 받으며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앨릭스의 말처럼 “시간과 기억은 야단스러운 실내장식 회사와 같아서, 늘 가구를 이리저리 옮기고 방을 다시 디자인하고 심지어 재배정하기까지” 하고, “기억 여사께서는 은근한 속임수에 대단히 능하”기 때문이다. 영화와 연극이라는 설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오랜 세월 연극배우로 살았던 앨릭스는 존재의 비일관성과 다면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난생처음 경험하는 영화 촬영은 “단편과 분절”로 이뤄져 있고, “믿을 수가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 기존의 경험처럼 자아가 여럿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아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는 새로운 경험은 흥미로우면서도 혼란스럽고, 전율과 불안을 동시에 일으킨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 단편과 분절을 강조한 설정 때문에 이 소설은 복잡한 윤곽을 파악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린다. 빛이 비치지 않은, 즉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에 관해서는 그저 짐작하며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하나하나 시적 효과로 가득하고, 유머와 통찰까지 갖춘 문장들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결말에 도착해 있을 테니 말이다. 밴빌은 섬세하고 정밀한 필치로 과거와 현재를 엮어낸다. 경지에 이른 문장들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 한 사람의 존재가 어떻게 구성되고 또 재구성되는지를 눈앞에서 보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밴빌은 오십 년이 넘도록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며 맨부커상, 프란츠 카프카 상, 유럽문학상,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언급되고 있다. 『오래된 빛』은 성실히 자신만의 문학적 스타일을 구축해온 그의 진면모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한겨레 .txt 2025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