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2일 가입 · 5권 적독
페미니스트 비건 채식주의자이자 진보적인 독립 연구자인 캐럴 제이 애덤스가 쓴 《육식의 성정치(The Sexual Politics of Meat)》는 은폐돼 있던 육식과 페미니즘의 관계를 밝혀 커다란 충격을 던진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2003년에 한국어판이 나온 적이 있지만, 이번 책은 2015년에 나온 출간 25주년 기념판을 바탕으로 한 전면 개정판이다.
초판부터 남아 있던 오류를 고치고, 육식의 성정치를 보여주는 최근 사례와 많은 시각 이미지가 담긴 긴 후기를 덧붙였다. 여전히 애덤스는 문학 작품, 팸플릿, 미디어, 광고, 일상 대화 등에 내재된 육식의 가부장제적 의미를 탐색하는 ‘고기의 텍스트’ 분석, 곧 ‘텍스트의 성정치’를 통해 페미니스트와 채식주의자 사이에 대화의 통로를 열어준다.
또한 페미니즘을 여성만의 문제로 보는 태도나 채식을 채식주의자만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은연중에 남성의 가부장제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한다며 비판한다. 비로소 페미니즘과 채식주의가 연결되면서 가부장제-남성 지배와 공장식 축산-육식에 대항하는 페니미즘-채식주의의 논리와 실천이 모습을 드러낸다.
박찬욱, 영화에 경의를!
『박찬욱의 오마주』는 감독 이전에 영화평론가로 활동했던 그의 첫 번째 평론집으로, 절판된 이후 수많은 영화 마니아들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만들었던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비디오드롬』(1994)의 개정증보판이다. 기존의 70편 글을 개고하고 새로운 영화 이야기 55편을 더해 총 125편을 실었다.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비디오드롬』이 B무비 마니아로서의 독특한 취향을 대중적으로 선보이는 성격이 강했다면 개정증보판 『박찬욱의 오마주』는 좀더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면서 한층 깊은 영화세계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다. 국내 미개봉작을 비롯해서 본국에서도 외면당한 ‘저주받은 걸작’, 새롭게 해석된 ‘컬트영화’ 등도 다루고 있는데, 국내외에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의 작품세계가 형성된 배경을 엿보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아이다호〉〈양들의 침묵〉〈아비정전〉 등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B무비(〈어딕션〉〈세컨드〉〈토마토 공격대〉)나 장르영화(〈로보캅〉〈공포의 계단〉〈용서받지 못한 자〉)까지 섭렵해, 독자적인 시각으로 재평가했다. 박찬욱 감독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영화, 더 나아가 영화 장르 전체에 바치는 ‘오마주hommage’라 할 수 있는 책이다.
명작 속에서 인권을 생각하다!
미술을 매개로 인권을 이야기하는 『불편한 미술관』. 《불편해도 괜찮아》, 《불편하면 따져봐》를 이어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전하기 위해 기획한 교양서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 재미와 지식을 두루 갖춘 만화로 정평이 난 김태권이 이번에는 그림이 아닌 글로써 미술과 인권의 세계를 안내한다. 경쾌한 문장과 절묘한 비유를 통해 인권을 대중화하는 전작들의 취지를 잇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불편하게 바라보기’를 권한다.
시대, 지역, 사조 등에 얽매이지 않고 다채롭게 선정되어 고대 그리스의 조각부터 다빈치, 고흐, 앤디 워홀 등의 거장은 물론 작자를 알 수 없는 그라피티까지 다양한 작품을 통해 미적 가치를 주로 논하던 예술에 인권이라는 기준을 적용하며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한편, 인권이 적용되는 영역을 예술로까지 확장하며 우리 사회의 어떤 분야에서도 인권을 잊어서는 안 됨을 일깨워준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명작들도 그 속에는 차별적인 내용을 품은 경우가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인종차별, 여성차별, 이주민과 장애인의 인권,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인격권, 동물권 등의 주제를 명쾌하고 알기 쉽게 이야기하며 예술을 대하는 신선한 관점을 제시하는 동시에 인권의 영역을 예술로 확장하며 인권이 어디에나 적용되는 기본 가치임을 보여준다.
실비아 플라스김난희
오직 문학으로만 불멸을 꿈꾸었다,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국내 최초 완역 “영원은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 나는 결코 영원을 원한 적이 없다.”
실비아 플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 살아 있다 하더라도 여든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분노에 차 반항하는 시인이라는, 젊음의 면류관을 그에게 씌운다. 특히 그의 작품이 문학인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던 1980년대에 최승자, 김혜순, 김승희 등 여성 시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소개된 우리나라에서는 실비아 플라스가 더욱 광기의 시인으로, 저항의 아이콘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처럼 「거대한 조각상」과 「아빠」 「나자로 부인」 등 몇몇 작품만이 알려졌을 뿐, 그의 대중적인 인지도만큼 독자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세계를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면밀히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지 않았다. 실비아 플라스를 오랜 기간 연구한 박주영 교수가 한국어로 번역한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은 단편적으로만 인식된 실비아 플라스의 시 세계를 새롭게 조명할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그의 사후에 전 남편이자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스가 편찬한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은 1956년부터 1963년까지 실비아 플라스가 쓴 시 224편을 순서대로 정리했으며, 또한 1956년 이전에 쓴 습작시 50편까지 실렸다. 실비아 플라스 생전에 출판된 시집 『거대한 조각상』과 사후에 출판된 시집 『에어리얼』과 『호수를 건너며』 『겨울나무』에 수록된 시들은 물론, 그가 발표한 모든 시가 수록되었다. 언어를 조탁하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한,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최고의 이야기꾼을 꿈꾼 한 야심찬 문학가의 성장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1년 출간된 이 책은 이듬해에 작가 사후에 출판된 시집 가운데 처음이자, 지금까지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사진, 영화, 설치 미술까지 분야를 넘나든 전방위 예술가 아녜스 바르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주는 국내 첫 책
데뷔작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1954)으로 영화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며 일찌감치 ‘누벨바그의 대모’라는 수식어를 거머쥔 아녜스 바르다. 그는 기성 상업 영화의 관습을 거부하고 저예산, 즉흥성, 자유로운 촬영 기법을 중시한 누벨바그의 선구자로 불린다. 첫 작품을 만들기 전까지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다는 고백처럼 바르다는 영화를 잘 몰랐기에 오히려 기존의 영화 어법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진가로서 예술가 인생에 첫발을 내디딘 바르다는 “사진을 찍는 건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국립민중극장의 공식 사진가로 당대 유명 배우들의 사진을 찍으며 영화와의 연결 고리가 생겨났고, 자연스레 영화라는 또 다른 표현 수단을 얻게 됐다. 사진과 영화를 병행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 보이던 그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3) 촬영 중 발견한 감자를 설치 미술 작품으로 발전시키며 미술작가로의 행보를 시작한다. 머릿속에 펼쳐진 드넓은 세계를 시각적 우주로 만들어내는 방식에 한계란 없었다. 그러나 평생 쌓아 올린 바르다의 명성과 업적은 철저하게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에리크 로메르 등 같은 시대 남성 감독들 뒤에 놓여 왔다. “저는 그저 완벽한 문화적 도구일 뿐이에요. 사람들은 제가 시네마테크나 도서관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죠. 저는 잊힐 거예요.”
마음산책 열네 번째 ‘말 시리즈’의 주인공은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호랑이처럼 싸워야만” 했던 아녜스 바르다이다. 그는 누벨바그의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발견하는 모순들을 끊임없이 조명해왔다. 처음으로 국내에 바르다를 소개하는 책 『아녜스 바르다의 말』에는 1962년부터 2017년까지 55년의 세월을 가로지르는 스무 편의 인터뷰가 담겼다. 연도순으로 각본가, 영화평론가, 배우 등 각기 다른 스무 명의 인터뷰어와 나누는 때론 유쾌하게 장난스럽고 때론 묵직하게 진솔한 대화들은 읽는 이를 웃고 울게 한다.
유년 시절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자란 덕에 자유의 감각을 얻게 되었다는 일화부터 영화감독이자 창작자로서 느끼는 고충과 희열, 외부 반응에 휘둘리지 않으며 예술적 자아를 유지하는 힘, 삶과 사람을 향한 애정, 여성운동의 흐름에 대한 견해까지 내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인터뷰 당시 상황에 따라 감정이 격해질 때도 있고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즉흥적인 발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톡톡한 매력이다. 아녜스 바르다의 작품 세계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까지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말』은 그 자체로 귀중한 자료집 역할을 한다. 2019년 아흔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난 “작고 통통한 수다쟁이 할머니”는 작품을 넘어 그 자신의 말들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에너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 곧 죽겠죠. 하지만 제 작품은 저 스스로도 존중해요. 제 작품을 칭찬한다는 의미는 아니고요. 싸워서 얻어낸, 싸울 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의미로요. 돈도 없이, 힘도 없이, 보답도 없이 늘 투쟁해왔죠. 찾는 사람이 없어 한동안 손을 놓기도 했고요. 사람들은 제가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걸 원치 않아요. 제작비를 지원하지 않아요. 완성된 제 작품엔 박수를 보내면서도 말이죠. ─258쪽
바르다는 늘 경계에 서 있었다. 스스로 자신을 주변인으로 여겼다. 기존의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다. 사진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설치 미술로 자연스럽게 새 영토를 개척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바로 지금 자신에게 적합한 표현 수단을 찾았다. 그의 삶이 그의 작품 목록만큼이나 풍성해 보이는 이유는 끊임없이 세상과 교감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바르다에게 주된 표현 도구는 영화였고, 그는 그 도구를 마음껏 활용했다. 더할 나위 없이. ─407쪽 ‘옮긴이의 말’ 중에서